첫 번째 창작집에서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썼다. 그러고 나니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내가 써보지 않은 방식으로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면서 나 자신의 서사가 깨졌기 때문이었다. (중략) 하여 나는 일단 내 골방을 볼 수밖에 없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지도를 읽고 길을 찾아가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하고 20세기 초에 루카치는 말했다. 그런데 얼마 전 태평양 작은 섬 솔로몬 제도에서는 지금도 창공의 별을 보며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별빛에 의존해 어두운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보면서 루카치의 문장 중 ‘시대’를 ‘사람’으로 고쳐 다시 생각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아인슈타인은 분명 그런 사람이었다.
1972년 서울의 변두리 지역에서 태어나다. 출생은 그 자체로 나에게 상징이다. 변두리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출생신고를 올린 곳에서 서른하고도 세 해 동안 여전히 살고 있는 것. 그 한 문장이 내 삶의 형태를 압축한다. 주변인이면서 동시에 몸도 마음도 처음 닿은 곳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내성을 지닌 사람. 그러므로 사이버 공간에서 즐겨 사용하는 아이디 faddist는 나의 이상이자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대학에 진학하여 문예창작을 공부했으나, 기억나는 건 안개뿐이다. 술도 담배도 할 줄 모르는, 지극히 건전하고 성실한 습작 시절을 보냈다. 사는 것만으로도 고단한 청춘이라 다른 것에 취할 겨를도 없었고, 책 읽고, 쓰는 일도 충분히 바빴다. 하지만 막상 졸업 후에는 일하느라 바빴다. 첫 직장의 연봉은 9백만원. 모자라는 돈은 아르바이트로 채워가며 사느라 문학은 언제나 미완의 꿈이던 이십대 중반. 잘 나가는 프리랜서로 살게 해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가 사직. 더 좋은 조건의 이직도 거절. 그런데 IMF 사태가 터졌다.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던 한 달,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려고, 단지 그 시간을 견디느라 오랫동안 놓고 있던 소설을 썼다. 그 소설로 그 해(19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이후 준비되지 못한 축배의 쓴잔을 맛보며 여러 해를 보냈다.
열심을 다한 글은 나를 배반하고, 기대고 싶었던 사람들은 외려 더 서슬 퍼런 칼날로 내 마음을 그어대고. 네루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터널처럼 외롭'고 우울했던 시절에 <작업> 동인을 만났다. 그들의 격려 덕분에, 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소설을 쓰고 갈망하던 때의 마음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더불어 그 시간 동안 나한테 밥 사주고, 술 사주고, 놀이동산에 데려가주고, 해 지는 바다를 보여준 비문학적 친구들도 많이 고맙다. 7년, 만으로 6년 만에 첫 창작집을 묶으면서 그들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쓰는 동안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런지라 책을 묶는 심정이 많이 애틋하고, 복잡하다. 비약을 허락한다면 좋은 혼수 하나 장만해주지 못하고 무남독녀 외딸 시집 보내는 가난한 어미의 심정이다. 그러나 글에는 저마다의 운명이 있는 법. 주인을 닮았다면 제법 고단이야 하겠지만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그 몫을 당부드리며 인사를 고하노니 잘 가라, 나의 첫 책. 잘 살아라 <안녕, 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