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북악산 등산로에서 덩치 큰 흰 개를 만났다.
아직 눈이 맑고 털이 고왔다.
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유기견으로 보였다.
한참 동안 따라오던 개는 가라며 인상을 쓰던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저택 정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벽 너머로 뛰노는 꼬마들의 머리가 살짝살짝 보였다.
어머, 집 안에 트램펄린이 있는 거야?
좁은 문틈 사이로 다가가 엿보려는 순간
사납게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물러섰다.
나를 쫓아오던 버려진 개와 나를 경계하던 저택의 개.
그날 서로 다른 둘을 만난 경험이 『바닐라』를 쓰게 만들었다.
성북동 산기슭의 멋있는 저택과 그 아래 다세대 주택 사이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걸을 때면 버려진 개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나를 따라오던 그 선한 얼굴이 눈에 밟힌다.
미안하다.
나는 앞으로도 내가 보는 세상을 희곡으로 쓸 것이다. 세상과 사람을 보는 마음이 더욱 깊고 맑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깨끗한 눈을 가진 정직한 작가로 살고 싶다. (…) 아버지는 건강한 노동자로 평생을 사신다. 그분의 땀과 고독 옆에 이 책을 놓아드리고 싶다. 천천히 오래오래 읽으셨으면 좋겠다.
2005년 12월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날, 애써 기쁨을 감추며 폼 잡고 있던 나를 노려보던 고故 윤영선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이 다시 들려온다. “좋냐? 너 임마, 이제 큰일 났어! 큰일 난 거야.” 그 눈빛 잊지 못하는 겁 많은 작가가 되고 싶다.
_<희곡집을 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