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이별이 너무 많고, 나쁜 일은 늘 일어나고, 누구나 실수를 한다. 젊다는 건 실수나 실연이 실패가 아니라 연구일 수 있기에 좋다. 중요한 건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 올 일들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라는 멈추지 않는 목표를 가진 나영은 진정한 행복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쓰지 않은 나영의 다음 시간에 더 큰 행복과 즐거움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세상의 규칙과 사회적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더 많이 가진 자의 권위를 따르지 않으며 다수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는,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기를 원하는 그들을 무정부주의자들로 명명했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원하는 것에서 절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계속 할 수 있는가?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한 가지를 가진 인생과 진심으로는 원하지 않지만 뭐든 가질 수 있는 인생 중 어떤 인생을 원하는가? (……)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왜 우리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것으로 느끼며 그것을 가지려고 일생을 아등바등 살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고 불운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리고 질문에 대한 대답도 질문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림" 대신 쓰고 싶은 그 "무엇"이 있는가? 지금부터 꿈을 꾼다고 해도 화가도 사진작가도 가수도 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치다. 더 느리고 더 현명한 루저로 사는 것은 때로 삶을 예술로 만든다.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 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소모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모퉁이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것도 저것도 겪어 본 후에 도달하게 되는 꼭짓점도 있다는 말이다. 뭐든 적당히가 좋지만 ‘적당히’를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정답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