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소설집에 묶은 단편들을 모두 사십대에 썼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생물학적 나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다들 위안 삼아 말하지만 실제 맞이한 사십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은 변화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대부분 봄도 여름도 아닌, 가을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러면 내가 서 있는 지금은 8월의 끝자락쯤 될까, 혹은 후하게 쳐준다면 장마가 막 끝나갈 7월 중순쯤, 무엇이든 이제 나는 적어도 어떤 봄과 여름에 대해서는 말할 준비가 충분히 된 것 같다.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이별한 누군가와 재회하는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은 내가 처음 글을 쓰려고 했을 때부터 나를 붙들고 있던 문제이지만 다시 만나는 것이라니, 그것은 얼핏 상처의 치유나 관계의 회복처럼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결손의 확인에 가까워 보였다. 뚜벅뚜벅 걸어가 장막을 확 젖혀 어느 무대를 매섭게 쏘아보는 듯한, 하지만 거기에서도 어떤 환하고 무른 기억들이 쏟아져나와 그것이 지닌 에너지에 문득 손을 떨구고 마는. 그 모든 것들을 무사히 소설로 쓸 수 있어서 기쁘다. 이렇게 또 한고비를 넘는다.
12년 전, 온전히 나의 어떤 갈구로 시작된 글쓰기가 여기에 이르게 된 건 독자분들 덕분이다. 읽어주는 분들 덕분에 더 쓰거나 혹은 덜 쓸 수 있었다. 그 절묘한 균형감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사실상 소설 쓰기의 기저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그것은 곧 내가 무엇을 위해 쓰려고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응답이라는.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제목은 정말 어느 피자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 날 떠올렸다. 망원의 그 식당에서 나와 걷는 동안 나는 페퍼로니 대신 다른 말들도 한번 넣어보았다. 종암동에 특별한 인연이 없는데도 우리는 종암동에서 왔어,라는 문장도 생각해보았다. 그외에 스스로 붙여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그러다 처음에 생각한 대로, 좀 엉뚱하고 이상하기는 하지만 페퍼로니로 다시 안착되었고 이제는 그 문장 뒤에 다른 하나도 붙여두고 싶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그리고 아무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했지. 그렇게 해서 어떤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가능한 무른 마음을 갖는 여름이길 빈다.
봄비를 들으며 보내는 4월의 마지막 밤
김금희
어려서 부모님이 주셨던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는 작은 쪽지와 함께 조그맣게 접힌 천원짜리 지폐가 있었다. 쪽지에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거나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라거나 하는, 어린아이로서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을 당부들이 적혀 있었으므로 그 내용에 대한 세세한 기억은 없지만 눈을 뜨면 머리맡에 선물이, 작은 탄성을 자아내는 기쁨이 있었다는 기억만은 선명하다. 이후 성장하는 동안 겪은 어떤 불행들도 그때 그 겨울의 빛을 완전히 앗아갈 수는 없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손으로 바람을 가리듯 그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내 안의 무언가가 힘써 막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 이 연작의 시작점인 「크리스마스에는」(『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창비 2021)을 쓰고 나서 다른 작품들로 이어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팬데믹이 오면서 「첫눈으로」(『놀이터는 24시』, 자이언트북스 2021)의 소봄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 예정된 작업들을 포기하면서 「은하의 밤」 속 은하를 소설로 옮겨낼 수 있었다. 우연히 이어진 어려움들이 연작을 완성시켜준 셈이다. 창비 ‘스위치’ 등에 연재를 시작해 한편 한편 보탤 때마다 마음속 가장 깊은 그늘과 가장 환한 빛을 동시에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한해를 정신없이 보내다 연말이 되면, 곧 소멸될 일년이라는 시간과 그 속에서도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들이 더 뚜렷해지듯 말이다. 인물들 저마다 각자의 어려움과 피로, 슬픔과 고독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긴긴 밤을 지나 걸어오면 12월이라는 기착지에 멈춰 서게 되고, 그것을 축복하듯 내리는 하늘 높은 곳의 흰 눈을 만나면 비로소 아득해지기도 한다고. 그렇게 우리가 아득하게 삶을 관조해낼 때 소란스러운 소동 너머에 있는 진짜 삶을 만지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고. 우리에게 겨울이,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무엇이, 어떤 사람이, 어떤 시간이 진짜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작업을 해나가면서 성당에 나가 주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작을 동네 성당에는 내가 그간 한번도 보지 못한 수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분들의 나직한 기도와 읊조림과 느린 발걸음 속에서 계절을 보내는 동안 때로 나는 너무 젊게 느껴졌고 때로 마치
백지처럼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채워나가야 할 아주 많은 수의 조각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 이 일곱개의 단편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소설을 내놓을 때마다 늘 혹독한 이별을 겪는 듯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을 그리며 글을 적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소설을 읽어줄 분들을 통해 『크리스마스 타일』 속 인물들이 더 씩씩하고 멋지게 세상 속으로 근사하게 섞여들 것만 같다. 그렇게 해서 맞이할
모두의 겨울에 평화가 있기를, 각자가 완성한 크리스마스 풍경들이 그 각자의 이유로 가치 있게 사랑받기를 바란다. 우리는 무엇도 잃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것을 잃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겨울에 필요한 마음들을 되짚어보며, - 작가의 말
나는 소설의 매기라는 여자와 재훈이라는 남자가, 한강을 향해 걷다가 걷다가 철새들이 겨울을 나는 너른 만이 있는 지방의 도시까지 갔다가 더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것 같은 제주까지 와서야 함께 보낸 시절들을 제대로 ‘앓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때는 서울과 제주까지 동선을 긋고 적당히, 아주 먼 거리라고 만족했는데 사실상 그곳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 마라도도 있고 그곳보다 압도적으로 생활경제가 갖춰져 있는 가파도가 있어서 육지의 버젓한 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 가을이 알려주었다. 만들어낸 이야기에서도 나는 완전히 예상하고 있지는 못한 셈이다. (……)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예상치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렇게 해서 조금씩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믿는다. 나중에 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오늘의 당혹스러움을 내일로 미루는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떤가. 그런데도 기꺼이 겪어내며 살겠다면, 지금의 무게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알 때까지 분투할 자세만은 취하고 있겠다면.
나쁘지도 이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는 일상을 가만히 견디다가도 어느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주변의 누군가에게-낯선 당신에게라도-가서 막무가내로 묻고 싶을 때가 잦은데, 그건 그러니까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하는 질문이다. 괜찮습니까, 하는 질문. 왜 이렇게 됐습니까, 괜찮습니까.
그렇게 물을 때 나는 사람들 곁에,
차가운 창의 흐릿한 입김처럼 서 있겠다, 누군가의 구만육천원처럼 서 있겠다, 문산의 느티나무처럼 서 있고, 잃어버린 다정한 개처럼 서 있겠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내가 소설로 가본 가장 폭넓고 긴 시간대이다. 당연히 많은 자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긴 참고자료 목록을 남겨둔 건 이야기를 다층적으로 만들기 위한 작가의 추적이 어떤 식으로 뻗어나가는가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물의 동작과 옷차림, 말씨, 표정, 거리의 활기와 적막, 집 안 마루의 감촉과 대온실의 유리창과 대나무발, 긴 잎의 바나나와 맹수사의 동물들, 풍랑에 흔들리는 상선과 눈 쌓인 피난길에 서로의 안전을 당부하는 불안한 얼굴들, 패전의 무게를 지고 남하하는 이들의 걸음걸이.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모색을 했는가를. 그래서일까. 작업을 하는 동안 어떤 소설보다 ‘이해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는 걸 깨달았다. 도서관과 공유 오피스와 카페를 전전하며 자료들을 읽다가 마침내 이해에 다다르면 슬픔이 차올라 자리를 박차고 나와 걷던 시간들이 이 건조한 목록에 담겨 있다. 내가 한 이해는 깨진 유리 파편처럼 그 시절을 자그맣게 비출 뿐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한참을 걸어야 감정이 식을 만큼 너무나 생생한 것이었다. 나는 자주 기도했다.
한때는 근대의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대중적 야앵의 배경지로, 역사 청산의 대상으로 여러번 의의를 달리한 끝에 잔존한 창경궁 대온실은 어쩌면 ‘생존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건축물과 함께 그 시절 존재들이 모두 정당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에게도 이해되기를.
가을이 오래고 길게 번지기를 바라며
2024년 10월
소설을 다 쓰고 난 지금,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 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그렇듯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복을 약속하지만 소설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어 이렇듯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소설을 읽어주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모두에게 끊이지 않고 흐르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에 앉으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발코니의 순한 잎들, 그리고 들려오는 춤, 기억, 꿈, 지시, 나무, 눈, 귤, 찬물로 만 국수와 안녕안녕- 같은 말들. 그렇게 일렁이는 말들이 마음의 안팎으로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오후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제야 찾아드는 텅 빈 평안이야말로 대상을 지정할 필요도 없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공원을 걷고 싶은 4월의 밤
첫 소설집인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을 개정판으로 묶는다. 오년 동안 쓴 작품들을 책으로 내고 한동안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듯, 최선을 다해 도망치듯 글을 써왔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서툴고 부족하고 어쩐지 숨고 싶은 일, 그래서 가끔 첫 작품집을 읽었다는 독자들을 만나면 그 순간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들곤 했다. 어쩌면 책을 새롭게 내기로 한 데에 동의한 건 그런 나의 주저함을 아예 반대의 방식으로 되잡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첫 소설집을 내고 이후의 칠년은 작가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혹은 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걷잡을 수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개정판 작업을 위해 원고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들이 아주 불안한 노지 아래에서 한껏 웅크려 미래를 기약하고 있는 작은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깨어나서 땅을 헤집고 나와 이 세상의 공기와 마주하겠지만 아직은 그런 세계를 기척이나 미미한 기미 같은 것으로 파악하며 자기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존재. 그런 침잠의 열도 역시 그 시절 내게 소중했던 것이기에 읽는 데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오래전 첫 책을 내고 받았던 가장 반가운 인사는 첫 조카가 보냈던 “이모 꿈을 이뤘네요” 하는 문자메시지였다. 그때 조카가 작은 손가락들을 옮겨 적었던 ‘꿈’이라는 말, 소중하지만 때론 그러한 이유로 힘들고 마음 상해야 하는 그 꿈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순간들이 작가로서 내가 보낸 시간의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첫 소설집은 어쨌든 늘 내게 특별한 의미로 남을 것이다.
그 이외에도 내가 바랄 수 있다면 이 책이 이제 막 소설 쓰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장력을 느낀 채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닿았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아주 훌륭히 첫 시작을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온통 두려움과 앞을 볼 수 없는 막막함 끝에 이루어놓은 첫 시작이기에 나는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어떤 용기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힘을 낸 데 대한 보람과 안도가 있을 것 같다.
창밖으로 버드나무가 흔들리는 2021년 5월에
『식물적 낙관』은 가드닝에 관한 안내서는 아니다. 일상의 다양한 주제를 담은 여느 형식의 산문집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산문 작업을 할 때보다 자유롭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에 대해 말하려 하자 마음은 더 쉽게 열렸고 소설 속 인물 뒤에 숨어 있던, 사실은 내 것이었던 기억들이 잎맥처럼 그려졌다. 이 년 동안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나는 감추어두었던 산문 속 자아가 자기방어를 뚫고 서서히 나오는 것을 느꼈다. 식물 집사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참 괜찮은 가드닝 시간이었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나오는 말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상하는 일을 두려워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인정하지 않고 싶었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과일이 물러지듯 자연스러운 일. 상할수록 더 진하고 달콤한 향을 내는 무언가가 있다고 마음이 다치는 과정을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상처를 들여다보는 사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진실, 깨달음, 아름다움, 서글픈 환희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통과해온 2015년부터 2018년까지의 단편들을 묶는다. 다행인 건 되도록 물러서지 않고 모든 상태를 기록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이 있다면 아름답다고 썼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잃어버리거나 비극과 직면했다면 슬프다고 썼다. 어리석었다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용서할 수 없을 듯한 순간에는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썼다.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인 고립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썼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며 상처 이후의 시간을 예비할 수 있다고.
여름에 나는 평생 살아온 도시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옮겨왔다. 여기 실린 소설을 쓴 장소와 책으로 펴내는 장소가 다른 셈이다. 그 차이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면 어느 날은 아주 찬 표면에 물기가 어리듯 슬픈 일이기도 하고 어느 날은 그렇게 해서 마음의 안팎 온도를 맞춰 더 나아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 모든 기대와 두려움으로 벅찬 여름이다. 하지만 소설을 쓴 날들에도, 지금도,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쥘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 소설을 선택해준 당신에게 내 미약한 응원과 용기를 보낸다. 그 덕분에 나는 오래 쓸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우리가 온전히 차지할 수 있는 이 영역을 포기하지 말자고 적어둔다.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그 욕심을 이해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문학동네 편집부와 해설을 써주신 백지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환하지 않은 여름은 없다고 생각하며,
2019년 8월의 끝에서
네번째 소설집에 묶은 단편들을 모두 사십대에 썼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생물학적 나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다들 위안 삼아 말하지만 실제 맞이한 사십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은 변화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대부분 봄도 여름도 아닌, 가을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그러면 내가 서 있는 지금은 8월의 끝자락쯤 될까, 혹은 후하게 쳐준다면 장마가 막 끝나갈 7월 중순쯤, 무엇이든 이제 나는 적어도 어떤 봄과 여름에 대해서는 말할 준비가 충분히 된 것 같다.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이별한 누군가와 재회하는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실은 내가 처음 글을 쓰려고 했을 때부터 나를 붙들고 있던 문제이지만 다시 만나는 것이라니, 그것은 얼핏 상처의 치유나 관계의 회복처럼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결손의 확인에 가까워 보였다. 뚜벅뚜벅 걸어가 장막을 확 젖혀 어느 무대를 매섭게 쏘아보는 듯한, 하지만 거기에서도 어떤 환하고 무른 기억들이 쏟아져나와 그것이 지닌 에너지에 문득 손을 떨구고 마는. 그 모든 것들을 무사히 소설로 쓸 수 있어서 기쁘다. 이렇게 또 한고비를 넘는다.
12년 전, 온전히 나의 어떤 갈구로 시작된 글쓰기가 여기에 이르게 된 건 독자분들 덕분이다. 읽어주는 분들 덕분에 더 쓰거나 혹은 덜 쓸 수 있었다. 그 절묘한 균형감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사실상 소설 쓰기의 기저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그것은 곧 내가 무엇을 위해 쓰려고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응답이라는.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제목은 정말 어느 피자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나온 날 떠올렸다. 망원의 그 식당에서 나와 걷는 동안 나는 페퍼로니 대신 다른 말들도 한번 넣어보았다. 종암동에 특별한 인연이 없는데도 우리는 종암동에서 왔어,라는 문장도 생각해보았다. 그외에 스스로 붙여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을. 그러다 처음에 생각한 대로, 좀 엉뚱하고 이상하기는 하지만 페퍼로니로 다시 안착되었고 이제는 그 문장 뒤에 다른 하나도 붙여두고 싶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그리고 아무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했지. 그렇게 해서 어떤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가능한 무른 마음을 갖는 여름이길 빈다.
봄비를 들으며 보내는 4월의 마지막 밤
우리는 매일매일 안녕을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안녕, 굳이 마지막을 떠올릴 필요가 없는 안전하고 무사한 안녕. 그렇게 안녕, 하고 사라지는 뒷모습에 다른 말을 붙일 필요가 없는 완전한 안녕. 하지만 그런 안녕을 기대하며 글을 시작하다 보면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사람처럼 고통스럽게 어제의 이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체스의 모든 것」을 쓰는 동안에도 그랬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그리 심각할 것 없는 하루하루였다. (……) 수상 소식을 듣고 나서 이 상을 받았던 작가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으며 읽어보았다. 이름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들에서 받았던 감동과 놀라움이 되살아났는데, 거기에 나라는 사람이 들어가도 되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더 노력하고 소설을 대하는 첫 마음을 잃지 말라는 무거운 격려라고 생각하겠다. 나는 지금 내 보잘것없는 두 손, 쓰고 있는 두 손, 쓰고 싶다는 마음 이외에 가진 것이 없는 나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써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나의 안녕을 도모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간절히.
어려서 부모님이 주셨던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는 작은 쪽지와 함께 조그맣게 접힌 천원짜리 지폐가 있었다. 쪽지에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거나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라거나 하는, 어린아이로서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을 당부들이 적혀 있었으므로 그 내용에 대한 세세한 기억은 없지만 눈을 뜨면 머리맡에 선물이, 작은 탄성을 자아내는 기쁨이 있었다는 기억만은 선명하다. 이후 성장하는 동안 겪은 어떤 불행들도 그때 그 겨울의 빛을 완전히 앗아갈 수는 없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손으로 바람을 가리듯 그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내 안의 무언가가 힘써 막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 이 연작의 시작점인 「크리스마스에는」(『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창비 2021)을 쓰고 나서 다른 작품들로 이어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팬데믹이 오면서 「첫눈으로」(『놀이터는 24시』, 자이언트북스 2021)의 소봄 이야기를 더 해볼 수 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 예정된 작업들을 포기하면서 「은하의 밤」 속 은하를 소설로 옮겨낼 수 있었다. 우연히 이어진 어려움들이 연작을 완성시켜준 셈이다. 창비 ‘스위치’ 등에 연재를 시작해 한편 한편 보탤 때마다 마음속 가장 깊은 그늘과 가장 환한 빛을 동시에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한해를 정신없이 보내다 연말이 되면, 곧 소멸될 일년이라는 시간과 그 속에서도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들이 더 뚜렷해지듯 말이다. 인물들 저마다 각자의 어려움과 피로, 슬픔과 고독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긴긴 밤을 지나 걸어오면 12월이라는 기착지에 멈춰 서게 되고, 그것을 축복하듯 내리는 하늘 높은 곳의 흰 눈을 만나면 비로소 아득해지기도 한다고. 그렇게 우리가 아득하게 삶을 관조해낼 때 소란스러운 소동 너머에 있는 진짜 삶을 만지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고. 우리에게 겨울이, 크리스마스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무엇이, 어떤 사람이, 어떤 시간이 진짜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작업을 해나가면서 성당에 나가 주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작을 동네 성당에는 내가 그간 한번도 보지 못한 수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분들의 나직한 기도와 읊조림과 느린 발걸음 속에서 계절을 보내는 동안 때로 나는 너무 젊게 느껴졌고 때로 마치
백지처럼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채워나가야 할 아주 많은 수의 조각들을 알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 이 일곱개의 단편이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소설을 내놓을 때마다 늘 혹독한 이별을 겪는 듯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겨울을 그리며 글을 적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내가 아니라 소설을 읽어줄 분들을 통해 『크리스마스 타일』 속 인물들이 더 씩씩하고 멋지게 세상 속으로 근사하게 섞여들 것만 같다. 그렇게 해서 맞이할
모두의 겨울에 평화가 있기를, 각자가 완성한 크리스마스 풍경들이 그 각자의 이유로 가치 있게 사랑받기를 바란다. 우리는 무엇도 잃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것을 잃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겨울에 필요한 마음들을 되짚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