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쓴 해,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서른여섯 살이 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이 나이가 되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오랜 과거에 죽은 한 사람의 육친과 눈앞의 수많은 희생자들 사이에서 소설가로서의 생각을 다잡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나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는 오랜 세월 저의 창작 활동의 중심적인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저 자신을 몹시 고민하게 만든 문제였으며, 감히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저는 다른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약을 발견하고 싶다, 발명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끌려 다양한 소설들을 쓰고 사색을 거듭해왔습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저의 고민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장편도 썼고, 실험적인 단편도 썼습니다. 그런 길을 더듬으며 다다른 것이 ‘분인’이라는 개념입니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제가 소설에서 전개했던 분인주의의 정수를 간결하고 평이하게 정리해주길 바란다는 독자의 강한 소망에 힘입어 만들어진 책입니다.
소설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재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자기를 긍정할 수 없는, 죽느냐 사느냐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소설과 마주할 여유가 없을 거라는 사정도 이해합니다. 또한 이 고민은 대개 10대 무렵부터 시작되므로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작업에도 의의를 느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광범위한 반향을 얻어서 저는 출간 후에 기업 세미나나 학교 현장, 정신의학 학회나 심포지엄, 나아가서는 자살 대책 문제에 몰두하는 비영리 단체의 이벤트 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강연 의뢰를 받았습니다.
현실은 다양하며 개개인의 고민 또한 복잡합니다. 저는 제 소설이 만능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분인주의 역시 여러 가지 의문이나 비판을 발판으로 앞으로 더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게 편안해졌다”고 말씀해주신 분들이 많았다는 점에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나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는 오랜 세월 저의 창작 활동의 중심적인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저 자신을 몹시 고민하게 만든 문제였으며, 감히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저는 다른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 약을 발견하고 싶다, 발명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끌려 다양한 소설들을 쓰고 사색을 거듭해왔습니다. 그 까닭은 아무래도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저의 고민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장편도 썼고, 실험적인 단편도 썼습니다. 그런 길을 더듬으며 다다른 것이 ‘분인’이라는 개념입니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제가 소설에서 전개했던 분인주의의 정수를 간결하고 평이하게 정리해주길 바란다는 독자의 강한 소망에 힘입어 만들어진 책입니다.
소설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현재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자기를 긍정할 수 없는, 죽느냐 사느냐는 긴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좀처럼 소설과 마주할 여유가 없을 거라는 사정도 이해합니다. 또한 이 고민은 대개 10대 무렵부터 시작되므로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작업에도 의의를 느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광범위한 반향을 얻어서 저는 출간 후에 기업 세미나나 학교 현장, 정신의학 학회나 심포지엄, 나아가서는 자살 대책 문제에 몰두하는 비영리 단체의 이벤트 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강연 의뢰를 받았습니다.
현실은 다양하며 개개인의 고민 또한 복잡합니다. 저는 제 소설이 만능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분인주의 역시 여러 가지 의문이나 비판을 발판으로 앞으로 더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게 편안해졌다”고 말씀해주신 분들이 많았다는 점에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책의 제목 <당신이, 없었다, 당신>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두번째의 ‘당신(あなた)’은 ‘저편’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부재는 읽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메워집니다. 작가란 항상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에게 존재했을지도 모를 세계와 존재했을지도 모를 인간을 제공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세계와 등장인물이 읽는 이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소설을 쓰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10대 때처럼 서로 감정만 높아지거나 상처 입거나 하는 게 아니라, 일도 있고 가정도 있는 이들의 사랑, 거기서 배어나오는 인간성을 리얼하게 그려봤으면 했어요. 세상이 살벌한 요즘, 소설을 읽고 홀린 듯 아름다운 세계에 젖어들 만한 시간을 나 스스로도 원하고 있었고 독자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어머니는 유일하게 ‘본심’을 말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본심’을 알고 싶어하는 동시에 나의 ‘본심’을 알아주길 바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결국 ‘본심’이란 무엇일까요? 주인공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머니와의 생활이 어느 날 갑자기 끝을 고해버린 것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 생활을 끝내고 싶어한 것이 바로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의 교류를 계기로 어머니의 ‘본심’을 조금씩 이해해나갑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한다는 데 괴로워합니다. 그가 슬픔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가는 과정을 통해 부모 자식에 대해, 타인의 생명에 대해, 격차에 대해, ‘보통’이란 것에 대해, 그리고 역시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장송> 출간 이후 저는 곧바로 '다카세가와', '얼음 덩어리', '추억' 세 작품을 연달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제가 여러 차례 입에 담은, '오서독시의 탐구를 통해 소설의 존재방식을 모색하고자 한다'라는 말에 담긴 '진심'을 무엇보다도 독자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시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집은 초기 삼부작인 <일식>, <달>, 그리고 <장송> 이후 저의 집필활동의 방향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렇다면 도대체 소설은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 것인가?'라는, 모든 현대작가에게 던져진 물음에 대한 제 최초의 대답이 될 터입니다.
이번 작품은 모두 현대를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태껏 제 작품이 어렵다고 느꼈던 분들도 무리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것이며, <일식> 이후의 독자분들께는 이전의 세 작품이 왜 씌어져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의 인터넷 원년은, 1995년이라고 한다. 불과 10년 정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전의 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적응하고 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 일은 어떻게 추진했을까? 친구는 어떻게 만났을까? 아니,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웹 2.0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다시 놀라운 변화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두 사람은 현재에 대해 그리고 미래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송>은 말 그대로 유럽 근대 낭만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두 명의 예술가 프레데리크 쇼팽과 외젠 들라크루아을 중심으로 시대 그 자체를, 사람들이 '사물을 느끼는 방법'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리려 한 작품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근대'에 있어서의 소설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합니다. 예술의 표현양식은 그 시대의 제도와 사조, 분위기 같은 것과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얽혀 있습니다. 시대를 고찰하는 것은 그 시대의 예술을 고찰하는 것이며, 예술을 고찰하는 것은 곧 그것을 낳은 시대 그 자체를 고찰하는 것입니다.
근대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고 있는 도시공간을 가장 리얼하고 견고한 토포스로서 작품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지방화되어 보편성을 상실했지만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폐쇄적인 전체에 있어서 이른바 실험처럼 표현하는 기술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현대와 같이 고도로 정보화되고 복잡화된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양식은 그것에 맞는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제가 노린 것은 무엇보다, 소설이라는 것의 가장 오서독스한 양식을 시대와 아울러 재고하여 그중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에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를 확인한 다음, 오늘날의 새로운 표현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취미에 가까운 시험에서 끝나지 않고, 동시대의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정체(停滯)를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지금 완성된 작품을 앞에 두고 저는 조금이나마 이 성공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있습니다. 씌어져야 하는 대작이란 아마도 작가를 한없이 안으로 향하게 하면서 동시에 바깥에 향해 열릴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는 작품일 것입니다.
제가 이 <장송>이라는 소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근거는, 이렇게 이치에 맞다고 하기 힘든 기묘한, 그러나 극히 강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송>은 말 그대로 유럽 근대 낭만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두 명의 예술가 프레데리크 쇼팽과 외젠 들라크루아을 중심으로 시대 그 자체를, 사람들이 '사물을 느끼는 방법'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리려 한 작품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근대'에 있어서의 소설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합니다. 예술의 표현양식은 그 시대의 제도와 사조, 분위기 같은 것과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얽혀 있습니다. 시대를 고찰하는 것은 그 시대의 예술을 고찰하는 것이며, 예술을 고찰하는 것은 곧 그것을 낳은 시대 그 자체를 고찰하는 것입니다.
근대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고 있는 도시공간을 가장 리얼하고 견고한 토포스로서 작품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지방화되어 보편성을 상실했지만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폐쇄적인 전체에 있어서 이른바 실험처럼 표현하는 기술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현대와 같이 고도로 정보화되고 복잡화된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양식은 그것에 맞는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제가 노린 것은 무엇보다, 소설이라는 것의 가장 오서독스한 양식을 시대와 아울러 재고하여 그중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에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를 확인한 다음, 오늘날의 새로운 표현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취미에 가까운 시험에서 끝나지 않고, 동시대의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정체(停滯)를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지금 완성된 작품을 앞에 두고 저는 조금이나마 이 성공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있습니다. 씌어져야 하는 대작이란 아마도 작가를 한없이 안으로 향하게 하면서 동시에 바깥에 향해 열릴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는 작품일 것입니다.
제가 이 <장송>이라는 소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근거는, 이렇게 이치에 맞다고 하기 힘든 기묘한, 그러나 극히 강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송>은 말 그대로 유럽 근대 낭만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두 명의 예술가 프레데리크 쇼팽과 외젠 들라크루아을 중심으로 시대 그 자체를, 사람들이 '사물을 느끼는 방법'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리려 한 작품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근대'에 있어서의 소설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합니다. 예술의 표현양식은 그 시대의 제도와 사조, 분위기 같은 것과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이 얽혀 있습니다. 시대를 고찰하는 것은 그 시대의 예술을 고찰하는 것이며, 예술을 고찰하는 것은 곧 그것을 낳은 시대 그 자체를 고찰하는 것입니다.
근대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고 있는 도시공간을 가장 리얼하고 견고한 토포스로서 작품 내부에 도입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지방화되어 보편성을 상실했지만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폐쇄적인 전체에 있어서 이른바 실험처럼 표현하는 기술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현대와 같이 고도로 정보화되고 복잡화된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양식은 그것에 맞는 새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제가 노린 것은 무엇보다, 소설이라는 것의 가장 오서독스한 양식을 시대와 아울러 재고하여 그중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에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를 확인한 다음, 오늘날의 새로운 표현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취미에 가까운 시험에서 끝나지 않고, 동시대의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정체(停滯)를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지금 완성된 작품을 앞에 두고 저는 조금이나마 이 성공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있습니다. 씌어져야 하는 대작이란 아마도 작가를 한없이 안으로 향하게 하면서 동시에 바깥에 향해 열릴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는 작품일 것입니다.
제가 이 <장송>이라는 소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근거는, 이렇게 이치에 맞다고 하기 힘든 기묘한, 그러나 극히 강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대량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현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책도 '되도록이면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 '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속독 콤플렉스 '다. 독서를 즐기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속독 콤플렉스 '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책을 빨리 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빨리 읽으려다보면 자연히 빨리 읽을 수 있는 얄팍한 내용의 책으로 손이 가기 마련이다. 반대로 천천히 읽으려 한다면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내용이 있는 책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물론 무턱대고 천천히 읽으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말했듯,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독서에도 역시 비결이 있다. 결코 어렵지만은 않은 그 비결을 터득한다면, 독서는 그것을 모르고 닥치는 대로 문자를 좇을 때보다 더 즐겁고 의미 있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인격적으로도 성장시켜줄 것이다.
이 책은 그 비결에 대해 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