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15년 동안 《로마제국 쇠망사》 원서를 세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그 방대한 분량에 놀라움과 위압감을 금치 못했다. 원서는 국판 크기의 600쪽짜리 책 여섯 권으로, 2백자 원고지 2만 장 분량인데 요즘 나오는 짧은 장편소설로 치면 무려 스무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원서를 완독하고 내려놓을 때마다 뚜렷한 스토리라인과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체의 핵심만 추려낸 축약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축약본은 총 71장의 관련 주제들을 모두 전달하되 원서의 3분의 1 분량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미 나온 영미권 축약본 네 종을 참조하되 원서의 각주들은 모두 생략했고, 가급적 역주 없이 본문만 읽어도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도록 친절한 번역을 시도했다.
나는 지난 15년 동안 《로마제국 쇠망사》 원서를 세 번 읽었다. 읽을 때마다 그 방대한 분량에 놀라움과 위압감을 금치 못했다. 원서는 국판 크기의 600쪽짜리 책 여섯 권으로, 2백자 원고지 2만 장 분량인데 요즘 나오는 짧은 장편소설로 치면 무려 스무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원서를 완독하고 내려놓을 때마다 뚜렷한 스토리라인과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체의 핵심만 추려낸 축약본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축약본은 총 71장의 관련 주제들을 모두 전달하되 원서의 3분의 1 분량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미 나온 영미권 축약본 네 종을 참조하되 원서의 각주들은 모두 생략했고, 가급적 역주 없이 본문만 읽어도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도록 친절한 번역을 시도했다.
다자이라는 작가는 <인간 실격>이나 몇 편의 단편소설만 읽어서는 전모를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 다자이는 자신의 문학적 배경이나 사상적 변화를 거의 일기를 쓰듯이 자신의 모든 작품에 투영했기 때문이다. 가령 단편 「유다의 고백」이나 장편 <신햄릿>을 읽지 않으면 그의 슬픔과 불안이 어디서 오는지 그 분명한 기미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또한 「후지산 백경」, 「아버지」, 「오상」, 「비용의 아내」, 「오바스테」 같은 단편들을 읽지 않으면 그의 가정사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 이 책은 오로지 다자이가 매력적인 작가라는 것을 알려드리려는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 집필되었다. 그런 만큼 어떤 작가를 아주 좋아하다 보면 자신의 배움과 재주 같은 건 돌아보지 아니하고 이렇게 긴 글을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가상하게 여기며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내내 지적인 흥분과 전율을 느꼈고, 에드워드 기번이 환생해 18세기 미국 역사를 집필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기번은 객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냉소적인 어조로 글을 써나간 역사가인데, 그런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이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내내 지적인 흥분과 전율을 느꼈고, 에드워드 기번이 환생해 18세기 미국 역사를 집필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기번은 객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냉소적인 어조로 글을 써나간 역사가인데, 그런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이 훌륭한 책을 번역하는 내내 지적인 흥분과 전율을 느꼈고, 에드워드 기번이 환생해 18세기 미국 역사를 집필한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기번은 객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냉소적인 어조로 글을 써나간 역사가인데, 그런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오비디우스는 신화에 대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낯설게 하면서), 그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과 리얼리티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이러하게 전해지는 얘기가 있다>라는 것은, 이야기가 허구일 수도 있으며, 독자가 그것을 진실처럼 믿어 주는 순간에만 진실이라는 뜻이다.
『서밍 업』 속의 서머싯 몸은 결코 장황하지도, 불성실하지도, 속물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의 정직한 생각을 아무 두려움 없이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그래서 번역을 끝마친 지금, 나는 여전히 이 책을 좋아한다. 몸의 표현을 대구(對句) 삼아 다시 말해보자면, 이 책을 펴 들면 빈 강의실에 앉아 문장의 뜻을 알지 못해 끙끙대던 대학생, 강원도 전방 부대의 내무반을 비추는 흐린 등불 아래에서 이 책을 읽던 일등병, 직장 생활에 치이다가도 주말이면 이 책을 펴보던 회사원이 생각나서 내 가슴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이다.
번역가 생활을 해 오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어떻게 글을 쓰면 메시지가 잘 전달될까 늘 생각했다. 나는 글이란 쓰면 쓸수록 기술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그러한 기술이 저절로 좋은 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님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표현 기술이 좋아도 문장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발상이 없으면 그것은 눈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훌륭한 발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각종 서적의 중요하거나 멋지거나 인상 깊은 부분에 밑줄을 그어 놓고 틈틈이 그 부분을 들춰보며 그런 발상의 경로를 알아내려고 궁리해 왔다. 때때로 그런 문장을 노트에 옮겨 쓰면서 모방도 해보았으나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남의 발상이 곧 나의 발상이 될 수는 없었던 까닭이다. 이런 시행착오 끝에,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아주 간절히 말하려고 할 때 비로소 발상이 훌륭해짐을 알게 되었다. 누르고 눌렀던 어떤 생각이 내 안에서 흘러 넘쳐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때 그것을 나의 목소리,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려 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십여 년 동안 약 스무 편의 글을 써 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