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이 문학의 길로 나서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열 살도 되기 전 어린 시절 수년간에 잇달아 겪었던 아버지와 맏형, 아우의 죽음이었다. 특히 스물여섯에 요절한 시골 멋쟁이 맏형은 그가 읽은 책들의 행간에 적어놓은 단상이나 일기장,생전의 친지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을 통해 이청준의 문학적 상상력에 근원적 영향을 미쳤다.
오지벽촌에서 난 '광주유학생'으로 마을의 자랑거리이던 이청준은 법학을 공부하여 출세하는 길 대신, 고등학교시절부터 빠져들었던 문학의 세계를 좇아 독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군대에 간 사이 함께 자취하던 이가 이청준의 일체의 책이며 이불이며 일기장이며 성적표며 하는 것들을 모조리 갖고 사라진 바람에 이청준은 졸지에 자신의 '과거'를 온통 잃어버리고 말았다.
제대 후 볼펜 한 자루와 노트 한 권 달랑 챙겨들고 친구들 자취방을 찾아 동가식서가숙하던 '부랑아' 시절에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잃어버린' 자신을 복원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이청준은 고도의 관념적인 주제들을 붙들고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넓혀가며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치열하게 굴착하는 한편, 지식인의 역할, 산업사회와 인간 소외 등 현대사회의 묵직한 주제들을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하였다. 등단작인 <퇴원>부터 <조율사>,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소문의 벽> 등은 이러한 계열의 대표작들이다.
또한 1976년 이후에는 <서편제>를 필두로 한 남도사람 연작을 발표하며 토속적인 정한을 담은 문제작들을 연달아 생산해 내었다.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서편제>는 잊혀져 갔던 '우리 것'의 가치를 전 국민적 차원에서 새롭게 조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6년에 다시 임 감독과 손잡고 영화제작과 동시에 그 밑그림으로 써낸 <축제>는 이청준 문학의 주요한 자양분이었던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과정을 소설화해 낸 것으로 문학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등단 이후 120여편의 중단편과 11편 의 장편소설, 그리고 수편의 '판소리 동화'에 이르기까지 이청준의 문학세계는 그 자체가 '서구 소설 장르의 한국적 갱신의 과정'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