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아도르노는 1903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독일 사회에 동화된 유대인으로서 포도주 도매상이었던 부친과 프랑스와 독일계 혈통으로 궁정 오페라 가수를 지냈던 모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음악학을 전공한 아도르노는 1924년 후설의 현상학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1년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교수 자격 논문이 통과되어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로 취임한다. 나치가 집권하자 1934년 영국으로 이주,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던 아도르노는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고, 1940년대 이후에는, 나치의 탄압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뉴욕으로 이전해 있던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 연구소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9년 귀국한 아도르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복직하여 수많은 강의와 저술 활동을 통해 전후 서독의 학계와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년의 아도르노는 국내 정치의 보수화 경향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면서 일어났던 68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는데, 점점 과격한 양상을 보이는 사회적인 소요와 거리를 둠으로써 일련의 사건들을 겪는다. 이후 몹시 혼란스러웠던 한 학기를 마치고 휴양길에 올랐다가 1969년 여름 스위스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아도르노의 사상은 칸트에서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는 독일 철학의 전통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1920년대 프랑크푸르트 시절 알게 된 이후 평생 절친한 친구로서 정신적 교류를 했던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을 이끌었던 아도르노는 블로흐와 루카치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한편, 인간 심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지평을 열어 놓았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사물에 대한 미시적 통찰을 통해 독특한 신학적·유물론적 사유 체계를 형성한 벤야민과도 긴밀하게 교류한다. 또한 쇤베르크가 대표하는 현대의 전위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도르노는 당시 급진적인 문화 도시였던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하면서 알반 베르크에게서 작곡 수업을 받고 음악 비평가로도 활동하며 음악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1940년대의 미국 망명 생활에 이어 1950~1960년대의 재건기 서독 사회에서 폭넓은 사회 비판과 문화 비판을 전개하였던 아도르노의 입장은 파시즘으로 귀결된 서구 문명의 역사, 그리고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그처럼 본질적으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부정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도르노의 사상은 다른 한편으로 (화해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완전한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궁극적인 화해를 염원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미국 망명 시절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은 2천 년 이상 지속된 서구 문명의 역사가 자연의 탈신화화에서 시작되었으나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를 거쳐 인간이 다시 신화적인 자연 상태와 다름없는 세계에 예속된 것을 계몽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으로 파악한다. 계몽이 신화로 퇴보했다는 암울한 역사 철학은 인류 역사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몽의 과정이, 그리고 특히 근대 계몽주의자들이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역사의 진보가 이른바 계몽된 시대로 자처하는 현대에 이르러 파시즘이라는 야만으로 귀착되었다는 시대 진단에서 출발한다.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 후 파시즘이 등장하고, 한편 소련에서는 러시아 혁명 후 스탈린 독재 체제가 구축되었던 역사적 현실을 목도한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그처럼 원시적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난 계몽이 야만적인 신화의 세계로 되돌아간 것은 다름아닌 ‘계몽의 자기 파괴’이며, 계몽의 역사를 주도했던 인간의 자연지배 원칙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렇듯 서구 계몽의 역사를, 인간에 의한 외적 자연의 지배가 인간의 내적 자연의 지배로 전이되고 마침내 사회적 지배 관계로 확장된 역사로 해석하는 『계몽의 변증법』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착화된 지배 구조의 뿌리를 캐내는 작업으로 시도되었다.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반유대주의’에 기반을 둔 독일 나치즘이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사회에 통합되지 않는 타자를 배척하고 제거하는 정치적 전체주의라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와 기술의 결탁을 기반으로 탄생한 획일적인 대중문화인 ‘문화 산업’ 역시 개인의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마비시키고 체제 순응을 강요하는 문화적 전체주의가 되는 것이다. 인류사, 특히 유럽 문명의 저변에 깔려 있는 파시즘의 심층 구조를 파헤친 부정적 역사 철학으로서의 ‘계몽의 변증법’은 『신음악의 철학』에서 개진된 음악의 발전사에도 충실히 적용되고 있다. 19세기 후반 산업화의 본격적인 진행과 더불어 세계와 인간의 물화가 극대화된 시기에 전통적인 조성을 파괴하면서 등장한 신음악은 스트라빈스키의 경우 원시 음악으로의 퇴행적 현상을 보이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은 더 이상 아름다운 가상으로 은폐되지 않는 극심한 시대의 혼란과 고통을 진실하게 표현한 진정한 현대 음악이 되는 것이다. 역시 미국 망명 시절에 쓴 잠언집인 『한 줌의 도덕』은, ‘손상된 삶에서 나온 성찰들’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망명 생활을 하는 유럽 지식인의 섬세한 자기 성찰과 제반 문화 현상에 관한 미시학적 고찰을 유려한 문학적 문체로 결합시키고 있다. 『계몽의 변증법』이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암울한 시대에 서구 계몽의 완전한 실패를 인식하고 계몽의 본래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계몽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다다르기 어려운 ‘유리병 속의 편지’로 쓰여진 것이라면, 『한 줌의 도덕』은 올바른 삶에 대한 신념이 배반당하고 전통적인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현실 속에서 다만 유토피아적인 이념의 편린들에 들어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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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철학적 주저로 꼽히는 『부정 변증법』은 『계몽의 변증법』을 인식론적이고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사상과 저작들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전제로서, 사유는 현실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부정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요지의 부정 변증법은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 정신을 절대시함으로써 기존 세계의 긍정에 빠진 헤겔이 대표하는 관념론적 변증법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데 주력한다. 고유한 사물의 특성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포섭하여 동일성을 창출하려는 주체의 횡포를 비판하는 아도르노에게 올바른 철학적 사유는 대상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가 관념론적 변증법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철학적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부정 변증법은 주체의 동일적 사유에 의해 훼손된 비동일적 객체를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동일성 철학을 둘러싼 가상을 벗겨 내는 데 목적이 있는 부정 변증법은 그것이 수단으로 사용하는 개념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일성 철학에 대한 비판은 사유의 동일화 작업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의 통일성을 위해 사물의 다양성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면서 동일적 사유가 내세우는 총체성 요구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개념으로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비동일자’는 어떤 존재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바로 동일적 사유에 의해 생겨나거나 밀려난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모든 경험적 현실을 초월한 존재의 이념을 상정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도르노는 관념론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던, 과학주의를 숭상하는 실증주의뿐만 아니라 독단론으로 흐른 유물론의 한계 또한 지적한다. 전통적인 의식 철학이 추구했던 사유의 동일성이라는 것이 대립 항쟁적인 사회와 모순된 관계를 이루는 한낱 가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반대 극단에 서서 주체의 의식을 말살하고 사실 숭배에 빠진 실증주의는 잘못된 현실을 긍정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물질과 경제를 우선시한 기계적 유물론 역시 현실의 변화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릇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유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물화된 인간 의식과 물화된 현실 세계를 해체시키는 것을 그 주요 과제로 삼는 부정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진단된 계몽의 본래적인 이념을 온전한 의미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현실에 직면하여 총체적인 무력함을 드러낸 서구 문화 전체를 크나큰 실패라고 규정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은 그 철저한 부정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동일적 사유의 자기반성을 통해 역사적으로 억압받은 비동일적 타자의 구제를 염원하는 한, 인간과 자연의 화해가 진정으로 실현되는 유토피아적 이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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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 도대체 문화가 아직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면서 문화와 야만의 변증법적 관계를 천착했던 아도르노는 사회 전반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영역에서도 계몽의 변증법이 완성되고 문화의 실패가 드러났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근대 이후 본격화된 계몽의 과정에서 탄생한 자율적 예술이 다른 문화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유럽 파시즘의 대두에서 그 정점을 찍은 사회의 야만화라는 일반적인 역사 과정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아도르노의 미학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과연 예술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정당성이 있는지, 만일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역사 철학적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 그처럼 예술의 역사적 발전과 사회적 위상을 고찰할 때, 객관적 세계의 물화 경향과 이에 상응하는 주관적 의식의 물화 경향이 가속화된 산업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시작된 현대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이른바 순수 예술이 탐닉했던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로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다. 태고의 주술적 단계를 거쳐 중세와 근대의 종교적·정치적 속박에서 해방됨으로써 획득된 예술의 자율성은 19세기 말을 풍미한 유미주의에서처럼 점차 현실과 유리된 채 스스로 신화화됨으로써 기존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예술 지상주의가 표방했던 지고한 순수 예술이라는 환상이 사라진 오늘날 우리는 또한 그 반대급부로서, 현실 세계와 극단적으로 대립해 있던 예술을 마침내 현대의 상품 사회로 끌어들여 예술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개인과 사회를 잘못 화해시킨 ‘문화 산업’에서 제공되는 값싼 위안을 얻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 현대 예술이 처한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미완성 유고로 출간된 『미학 이론』에서 아도르노가 예술의 자율성이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가하는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예술의 자율성에 내포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잠재력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근대 시민 사회에서 계몽의 이념을 자양분으로 취하면서 자라난 예술의 자율성에는 종래의 종교적?정치적 지배 관계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자유 의식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고, 이후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다른 문화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그릇된 현실에 대한 긍정으로 귀결된 예술이 앞으로도 존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본래적인 의미의 자율성에 부합하여 자신의 현재 위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인해 해체되기 시작한 예술의 구제는 오직 경험 세계에 대항하는 비판적 잠재력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예술의 자기비판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순수 예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던 현대의 전위 예술을 옹호하는데, 모름지기 물화된 세계와 타협하지 않는 진정한 예술은 현실에 동화되면서 현실에 대항하는 부정성을 그 본질로 한다. 즉 일차적으로 부정적 현실과 미메시스적 상관관계에 있는 예술은 동시에 부정적인 현실을 넘어서는 유토피아적 화해 이념을 선취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올바른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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